당시 노 대통령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위원이었고 이 지명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으로 87년 대선 양김(김영삼과 김대중)의 후보단일화 논의과정에서 생각을 달리 했지만 서로를 알게 되는 계기를 맞는다.
노 대통령은 양김의 `후보 단일화’ 쪽이었고 이 지명자는 김대중(DJ) 평민당 대통령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기울었던 것으로 관계자들은 회고한다.
두 사람은 87년 민주화 과정에서 이처럼 스치는 듯한 인연을 맺은 후 88년 각각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민주당과 DJ의 평민당으로 총선에 출마, 13대 국회 입성에 나란히 성공한다.
금배지를 단 제도권 정치인으로의 새 출발이었다.
변호사에서 뒤늦게 `운동권’으로 변신한 노 대통령과 서울대 재학시절부터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경력을 가진 이 지명자는 당시 기피 상임위였던 노동위에서 함께 활동하며 `친(親)서민·노동’이라는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앞서 13대 총선을 앞두고 YS의 영입 손짓에 약간 주저했던 노 대통령에게 이 후보는 “서로 당은 다르지만 다시 만나서 같이 일할 날이 있을 것”이라며 결심을 지원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지는데, 결국 그렇게 된 셈이다.
이처럼 정치권에서 움트기 시작한 두 사람간 신뢰는 서로를 밀어주고, 당겨주는 `동지적 관계’를 영글게 하는 밑거름이 됐다.
노 대통령이 91년 야권통합에 따라 창당된 소위 `통합민주당’의 대변인이자, 공천심사위원으로 있을 때 `이해찬 구하기’에 나섰던 것이 단적인 예다.
당 지도부는 이 지명자에게 공천을 주지 않기로 했으나 노 대통령이 `동반사퇴’ 으름장을 놓으며 재고를 강력히 요청, 자칫 정치적 낭인이 될뻔한 이 지명자의 92년 14대 국회 진출을 도왔던 것이다.
이어 97년 다시 찾아온 대선은 두 사람을 `정권 재창출’이라는 하나의 끈으로 다시 연결시켜준 계기가 됐다.
국민통합추진위(통추) 상임집행위원이었던 노 대통령이 DJ의 국민회의를 선택함으로써 두 사람은 97년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고 98년들어 종로 보선에 당선된 노 대통령은 국회 교육위원으로, 이 지명자는 교육부 장관으로 함께 하게 된다.
2002년 대선에서 노 대통령은 이 지명자를 선대위 기획본부장으로 기용했고, 이 지명자는 선거기획 사령탑으로 대선 승리의 특등 공신으로 자리매김됐다.
이 지명자는 당시 민주당 경선때부터 “노 후보의 승리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노풍(盧風)은 거품이 아니다”면서 노 대통령의 정체성과 경쟁력을 높이 샀다.
경선 라이벌이었던 이인제 후보가 노 대통령 장인의 좌익활동을 공격한데 대해 “아내와 사랑해 결혼했다. 그런 아내를 가진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한다면 나는 후보를 관두겠다”고 한 노 대통령의 감성적 호소도 이 지명자 작품이다.
이 지명자는 특히 노 대통령이 대선 하루전 통합21의 지지철회 선언에 “영문을 모르겠다”며 지지철회 번복을 위한 정몽준 통합21 대표 자택행을 계속 거부하자 “가야 이긴다”며 노 대통령의 등을 떼밀어 자택행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이영란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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