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金시대 종언 … 與大野小 재편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4-05-27 19:4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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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기내 예산안처리 못해 구태 재연등 ‘개점 휴업’
21세기 첫 국회였던 16대 국회는 대통령 탄핵사태를 초래한 극심한 정쟁과 여권의 분화, 정치권의 세대교체 갈등 등으로 점철된 격동의 시기였다.

16대 국회는 한국정치사의 관점에서 볼 때 `3김’으로 상징되는 구세대 정치세력이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붓고 17대 총선을 통해 새로운 세대로 주도권을 넘긴 과도기로 볼 수 있다.

2000년 4월13일 치러진 16대 총선에서 재적의원 273명 가운데 야당인 한나라당이 과반에 4석 모자라는 133석으로 1당을 차지했고, 여당인 민주당은 115석을 얻어 여소야대 의회 구도가 형성됐다.

16대 국회는 첫해에만 4번의 파행을 빚는 등 초반부터 정쟁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민주당과 함께 공동정권의 한 축을 이뤘던 자민련이 16대 총선에서 17석짜리 미니정당으로 축소됨에 따라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만들어주기 위해 교섭단체 구성요건을 20석에서 10석으로 완화하는 국회법 개정 문제가 내내 논란이 됐다.

교섭단체 문제는 끝내 2000년 7월 교섭단체 구성요건을 완화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민주당이 국회 운영위에서 강행 처리하는 것으로 번졌고, 2000년 말과 2001년초 민주당 의원 4명이 자민련으로 이적하는 `의원 꿔주기’ 해프닝도 연출됐다.

16대 국회 첫 정기국회는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의 `노동당 2중대’ 발언과 한나라당의 검찰 수뇌부에 대한 탄핵안 처리 문제로 44일간 공전하는 파행을 빚었고, 1963년 헌법 개정 이후 처음으로 정기국회 회기내에 새해 예산안을 처리하지 못하는 불명예스런 기록도 남겼다.

2001년 국회 역시 한나라당이 제출한 3건의 국무위원 해임건의안과 1건의 탄핵소추안, 언론사 세무조사를 둘러싼 정치권의 격한 논쟁, `이용호 게이트’ 등 비리의혹 폭로 공세 등으로 파행을 거듭했다.

2001년 한해동안 국회는 365일 중 불과 15일을 제외하고 연중 문을 열었지만 대부분 `방탄용 국회’였고, 2002년 지방선거와 대선을 겨냥한 여야간 힘겨루기로 인해 민생입법의 처리가 지연되기 일쑤였다.

전년도에 이어 또다시 새해 예산안을 정기국회 회기내에 처리하지 못하는 구태를 재연하는 등 `개점휴업’ 상태였다.

2002년의 국회는 대선의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진 해였고, 그만큼 폭로와 정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민주당은 `16부작 드라마’로 불리던 국민경선을 통해 이인제 대세론을 잠재운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 후보로 만들었고, 한나라당은 이회창 후보가 97년 대선 패배의 설욕을 다짐하며 후보로 나섰다.

2002년 6월13일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민주당을 역대 선거사상 최대 표 차이로 따돌리고 압승을 거뒀고 이어 8월8일 있었던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낙승했으며, 한 때 60%를 넘었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도 하반기 들어 17~18%대로 추락했다.

이회창 후보의 당선이 유력시되던 대선 가도는 대선을 불과 20여일 앞둔 11월25일 노무현 후보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와의 여론조사 경선에서 승리하고 단일후보로 나서면서 급반전됐고, 마침내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과 `참여정부’의 출범이라는 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대선과정에서 악화돼왔던 민주당내 친노-반노의 대립으로 인해 2003년 벽두부터 여권은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으며, 정치권은 대선직후부터 숨돌릴 틈도 없이 불어닥친 초특급 사정열풍으로 여야를 막론하고 불법 대선자금의 모금과 집행에 관여한 의원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사태가 이어졌다.

2003년 9월20일 여권내 신당파와 한나라당 탈당파 의원들이 `국민참여통합신당’이라는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했고, 같은해 11월11일 47석의 열린우리당이 창당했다.

고질적인 지역구도를 깨기 위해 여권이 스스로를 원내 3당의 소수세력으로 약화시키는 사상 초유의 정치적 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또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이회창 캠프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인사들이 사법처리되면서 `차떼기’ 정당의 오명을 얻게 됐고, 노 대통령의 최측근들과 여당 의원들도 검찰에 소환되거나 구속되는 사태를 빚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10월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비리사건이 터지자 급기야 “재신임을 묻겠다”며 폭탄선언을 했다.

여권 분열과 대선자금 수사의 광풍과 함께 시작된 2004년의 전반기 국회는 17대 총선을 겨냥한 여야의 총력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국회 본연의 기능은 사라졌다.

창당 이후 10%대 지지율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우리당은 2004년 1월11일 전당대회에서 정동영 의원이 세대교체 바람을 일으키며 당 의장에 당선되면서 30%대 지지율로 올라섰고, 한나라당은 차떼기의 오명을 씻기 위해 여의도의 공터에 `천막당사’를 마련하고 박근혜 대표를 새 리더로 옹립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총선구도에서 수세에 몰리던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야권은 노 대통령의 선거개입 발언을 문제삼아 3월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경호권을 발동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무모한 탄핵소추 가결은 민심의 거센 역풍을 불러왔고,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재적의원 299명의 과반인 152석을 차지하고 한나라당은 121석에 그치는 여대야소로 16년만에 의회구도가 재편됐다.

탄핵역풍 속에서 치러진 17대 총선에서는 전체 현역 의원 중 34.8%만이 여의도 재입성에 성공 했다.

또 40대 이하 당선자가 43.1%로 지난 16대 총선의 28.5%보다 약 15% 포인트 가량 늘어났으며, 초선 당선자가 62.9%(118명)에 달하는 등 정치권의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이영란기자 [email protected]



/박영민기자 [email protected]



/최용선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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