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노무현’ 누구인가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2-12-19 23: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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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주권 시대’연 원칙주의자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1946년 8월 6일(음력), 경남 김해시 진영읍으로부터 10리쯤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빈농인 아버지 노판석씨와 어머니 이순례씨의 사이에서 3남 2녀 중 3남으로 출생했다.

봉화산과 자왕골을 등에 지고 있는 이 마을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으며, 막내인 데다가 재주도 많아서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유년과 학창 시절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공부도 잘하는 편이고 성격도 명랑한 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일화로는 교내 붓글씨 대회에서 편파적인 운영으로 1등상을 놓치게 되자 이에 대한 항의로 시상식날 2등상을 반납해 선생님으로부터 혼이 난 일이 있다. 이 사건은 그날이후 노무현에게 ‘자기중심적 사고’를 경계토록 하는계기가 됐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장학금을 받기 위해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부산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적지 않은 방황을 한 끝에 졸업 후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으나, 변변치 않은 대우에 실망, 고향에 돌아가 고시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사법고시 합격과 결혼
그는 어린 시절부터 큰 형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고시에의 막연한 꿈을 갖고 있었는데, 66년 10월에 고졸 출신들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사법 및 행정 요원 예비 시험'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66년부터 시작은 했지만 실제로 공부를 한 것은 군대를 갔다 온 다음인 71년 5월경부터였다. 합격하고 나서 2년간의 연수원 생활을 거친 후 1977년에 대전지방법원판사로 임용되었고 그 후 1978년에 변호사를 개업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중에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도 했다. 또 그 기간 중에 큰 형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도 했다. 1968년에 군에 입대, 전방 을지부대에서 복무한 뒤 1972년에 상병으로 제대했다. 당시에는 월남 파병 등의 이유로 병장 TO가 모자라 상병으로 만기 제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고시공부 중이던 1973년 1월에 고향 진영에서 같이 자라면서 사귄 권양숙 씨와 결혼을 했다.

◆부림사건과 인권변호사
전두환 정권당시 민주화운동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부산의 ‘부림'사건 이었다. 이는 서울의 ‘무림', ‘학림' 사건과 마찬가지로 저항의 기미가 있는 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이자, 조작사건이었다.

노무현은 이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행방불명된 학생들의 어머니의 모습, 고문을 당한 학생들의 모습 등을 보면서 이후 시국사건·노동 관련 사건 등 인권 변론에 치중하게 됐다.

또 84년 발족된 ‘공해문제연구소'의 이사가 됐고, 85년에는 송기인 신부를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재야운동에 나서는 한편, ‘노동법률상담소'를 차렸고 86년경부터는 변호사 업무를 거의 중지하다시피 하고 운동에 전념하여 87년 민주쟁취국민 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으로 ‘6월 항쟁'의 주역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부산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해 9월 대우조선의 이석규 씨가 파업중 거리시위를 나왔다가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사망 한 일이 발생하자, 임금협상과 보상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노동자측의 편에서 상담을 해주었으나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23일만에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13대 국회의원 당선 및 청문회 스타
1988년 노무현은 통일민주당의 공천 제안을 받고 부산 동구에 출마, 민정당 후보 허삼수씨를 누르고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5공비리조사특위'의 청문회 활동에서는 정주영·장세동 씨 등의 증인 신문에서 핵심을 찌르는 질문과 날카로운 추궁을 보여줌으로써 일약 청문회 스타로 부각되었다. 이는 노무현을 대중정치인으로 만들어놓는 기반이 되었으며 아직도 그를 ‘청문회 스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1990년 1월의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당에 반대하여 노무현은 당시 김정길 의원 등과 함께 당 잔류를 선언하면서, 꼬마 민주당 창당의 주역이 됐다. 이후 민주당 내에서 일관되게 김대중 총재의 신민당과의 야권통합운동을 전개, 마침내 두 당은 1991년 9월 통합민주당을 출범시키게 되었고, 그는 첫 대변인으로 발탁된다.

하지만 통합민주당의 간판으로 노무현은 92년 3월 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도전하지만 이번에는 민자당으로 당적이 바뀐 허삼수씨에 패배,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낙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92년 12월의 대선에서 물결유세단 단장으로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위해 뛰었고, 그 결과 다음해인 93년 3월 전당대회에서는 최연소최고위원으로 당선되어 당의 중진 반열에 오른다.

◆국민경선, 대통령 후보 당선
노무현은 2002년 3월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 16개 시·도에서 치러진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당당히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노무현의 당선은 ‘개혁과 통합'을 원하는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로 가능했고, 국민대권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또 노무현과 정몽준은 2002년 10월 정치개혁과 국민통합을 위해 후보단일화 하라는 국민의 뜻을 존중해 50%의 가능성을 서로 양보해 단일화에 전격적으로 합의했다. TV토론과 여론조사를 통해 노무현 후보가 단일 대통령 후보로 선정되었고, 정몽준 후보가 흔쾌히 승복함에 따라 후보등록을 며칠 앞두고 극적인 단일화에 성공했다.

비록 정 대표가 선거 전날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지만 노무현을 향해 있는 유권자들의 표심을 돌리지는 못했고, 그는 끝내 승자가 됐다.
/이영란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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