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치우의 인물채집] 대통령 경호관 박진이 편

시민일보 / [email protected] / 기사승인 : 2026-11-01 11:3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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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무장하십시오!”


팬티 광고였다. ‘제임스딘’이라는 속옷 회사의 첫 광고. 전유성씨가 만들었고 나는 어시스트 카피라이터였다. 팬티 한 장 입히면서 무장이라니. 총 한 자루 없이도 사내들 마음에 제법 비장한 바람을 넣었던 카피다.


여덟 분의 대통령 곁에서 그림자로 살았던 경호관 박진이 씨를 만날때마다 하필 그 팬티 생각이 났다. 대통령과 팬티라니. 이 엉뚱한 연결에는 사연이 있다.

오래 전 술자리에서 그가 말했다.


“형님, 전 매일 아침마다 오늘 죽을 준비를 합니다.”


허, 이 친구 봐라. 갑자기 죽을 준비라니. 대통령 등 뒤 1미터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그런데 그 1미터까지 가기 위해 매일 아침 죽음을 챙겨 나온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뒤따라 나온 말은 더 했다.


“최고로 좋고 깨끗한 팬티를 입고 출근해야 합니다.”


방탄복도 아니고 팬티?


죽음까지 꺼낸 이야기가 팬티로 내려오니, 웃어야 할지 술잔을 내려놓아야 할지 잠깐 갈피를 잃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일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의 설명 끝에 이런 말이 붙었다.


“만약 임무 중 그날이 오늘이라면... 쪽팔리잖아요.”


그는 그런 사람이다.


누군가는 목숨을 바친다는 말을 하려고 목소리부터 낮춘다. 박진이는 팬티 이야기를 한다. 비장한 각오 끝에 ‘쪽팔리잖아요’를 붙여놓으니 듣는 사람만 뒤늦게 숙연해진다. 웃자고 한 말 속에서 웃고 넘기지 못할 것이 걸려 나온다.


그에게는 출근할 때 갈아입는 속옷 한 장에도 오늘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들어 있었다. 남에게 보여줄 일 없는 가장 안쪽에서, 하루의 각오가 시작되는 셈이다.


대통령 등 뒤 1미터.


가까운 거리다. 손을 뻗으면 닿는다. 그러나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먼 거리일까. 본능적으로 엎드리고 싶은 순간, 오히려 온몸을 펼쳐 총탄을 막아야 하는 그 자리, 우리는 대통령이 어디를 갔고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한다. 그러나 그 등 뒤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서 있던 사람은 기억하지 않는다.


여덟 분의 대통령이 그 앞을 지나갔다. 얼굴도 걸음도 시대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동안 이 사람은 아침마다 진지하게 팬티를 골라 입고 출근했다. 그 사소한 동작에 담긴 마음을 듣고 나니, 대통령 곁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이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은퇴 후 그가 책을 냈다.  '대통령 등 뒤 1미터'.


제목을 보는 순간, 나는 또 그 술자리로 돌아갔다. 대통령 가까이에서 본 대단한 이야기보다 먼저, 한 사내의 아침이 궁금해졌다. 오늘 죽을 준비를 마친 사람이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그때 그의 얼굴은 어떠했을까.


거창하게 물었다가는 또 팬티 이야기로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은 자기 직업의 무게를 남의 술잔에 함부로 쏟아붓지 않는다. 슬쩍 농담으로 받아 마시게 한다. 한참 뒤에야 속이 뜨거워진다.


“오늘 밤, 무장하십시오!”


오래 전 우리가 만든 카피를 그에게만은 고쳐주어야겠다.

오늘 아침, 무장하십시오.


박진이는 아마 웃을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 아침에도 가장 좋고 깨끗한 팬티를 꺼내 입을 것이다. 부디 저녁에는 그것을 제 손으로 벗어놓기를. 그가 지킨 수많은 날처럼, 그의 하루도 무사히 끝나기를.


팬티 광고 한 줄을 떠올렸다가, 한 사람의 퇴근을 이렇게 간절히 바라게 됐다.
이제 민간인이 됐으니 노팬티도 상관없다고 했더니 살짝 삐졌다.
박진이는 그런 남자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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