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회담 반대 앞장 ‘투옥’
불도저식 사업추진 큰호평
“가난 때문에 기죽어 살던 시골 뒷골목 아이가 간난고초 끝에 대통령에 선출됐다”
1970~80년대 ‘샐러리맨 신화’의 주역이자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 신화’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명박 후보가 1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당선자는 지금의 화려한 모습과 달리 과거는 그리 평탄치 못했다.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의 대표인 셈이다.
그는 현대건설 입사 5년만인 29세에 이사에 오르고, 11년만인 35세에 사장, 22년만에 회장에 올라 최장수 CEO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뭔가 있으니 그렇게 승승장구 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 당선자의 일생은 순탄대로와는 거리가 멀다. 간난고초, 고난 속에서 굴하지 않는 ‘정신력’이 그를 지금의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다.
◇콤플렉스에 쌓여 보낸 ‘어린 시절’
그는 일제치하인 1941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충우씨(1981년 작고)와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채태원 씨(1964년 작고) 사이의 4남3녀(귀선, 상은, 상득, 귀애, 명박, 귀분, 상필) 중 다섯째였다.
어머니가 ‘치마폭에 보름달을 안는 꿈을 꿨다’고 해서 ‘명박(明博)’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족보에는 ‘상(相)자 돌림을 딴 ‘상경’으로 돼 있다.
이 당선자는 어린 시절을 콤플렉스 속에서 살았다고 고백한다. 집안이 가난해 코흘리개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 행상을 다녔다. 자연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 못해 외톨이로 지내야 했다. 성격도 내성적이 됐고 열등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포항중학교 시절에는 전교 2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수재 소리를 들었다. 이도 잠시, 당시 포항에서 이름을 날렸던 둘째 형(이상득 국회부의장)의 대학 학비를 대기 위해 고등학교를 포기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지독한 가난에 ‘쓰레기 청소’도
이런 그의 운명은 3년 후 대학 입학에서 다시 암운을 드리운다. 당시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했던 그는 대학갈 돈이 없어 서울 거리를 전전하다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 헐값에 대입용 참고서를 넘긴 덕분에 고려대 상대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입학은 했지만 가난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두려 했을 때 이태원 시장 상인들이 ‘쓰레기 청소’ 일을 주선해 간신히 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대학을 마치고 찾아온다. 대학에서 학생회장을 했던 그는 4학년 때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해 앞장서서 시위를 이끌다 붙잡혀 1심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반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 ‘호랑이’ 정 회장이 인생 전환 은인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호랑이’ 정주영 회장을 만나 신바람 나게 일했고, 승승장구하게 됐다. 대한민국 최고기업의 CEO 자리에 올랐고, 국회의원, 서울시장도 지냈다”며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해준 은인이라는 속내를 밝힌다.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꾀죄죄한 시골 뒷골목 소년이 ‘한국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집안이 너무 어려워 초등학교 때부터 엿, 아이스케이크, 뻥튀기 장사를 하고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악착같이 공부했던 소년 이명박은 현대건설 입사 이후에도 ‘몸에 밴 어린 시절’을 잊지 않았다.
현장 근무 당시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났는데, 말단 사원이었음에도 공사가 적자가 나면 정 회장(당시 사장)에게 그대로 사실을 말했을 정도로 직설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생활습관이나 성격이 어머니의 영향이라고 설명한다. 어머니 채태원씨는 매일 새벽 4시면 자식들 모두를 깨워 함께 새벽기도를 드리며 나라와 이웃, 가족, 친지를 위해 기도를 빼놓지 않았다. 또, 남의 일을 도와주되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가르침도 빼놓지 않았다.
◇생각은 ‘햄릿’, 행동은 ‘돈키호테’
이런 가르침이 ‘돈키호테’와 같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격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됐다. 현대건설 초년병 시절, 태국 건설현장에서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적이 있다. 당시 이 당선자는 회사 금고를 가슴에 끌어안고 죽기 살기로 버텼다고 한다.
서슬 퍼런 유신정권 말, 현대건설 사장이던 그는 당시 세도가였던 건설부장관과 맞선 일이 있다. 중동경기 붐에 편승, 실력 없는 건설업체들을 마구 진출시키려고 한 정부 방침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건설부는 현대 산하의 한 회사를 불법기업으로 몰아 해체 압력을 가했다. 이 당선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탄원을 했고, 결국 청와대는 현대 손을 들어줬다.
1980년 신군부가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이라는 경제정책을 들고 나와 현대자동차를 포기하라고 강요한 일이 있다. 국보위에 출두한 그는 군인들의 갖은 협박에도 끝내 들어주지 않았고, 현대차는 남게 됐다.
이보다 더 유명한 일화는 1980년대 초 정 회장의 장남 몽필씨(작고)가 이 당선자의 밑에서 전무로 일할 때다. 대재벌 후계자가 자기보다 어린 월급쟁이 사장 밑에서 일하려니 마찰이 생기게 마련.
당시 그는 “내가 나이는 적지만 일해 온 연륜으로는 정 전무 아버지 세대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고 명심해 주십시오”라며 분명한 태도를 표현했다. 이후 몽필씨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또, 중기사업소 과장 시절에는 서슬 퍼렇던 청와대 비서실에서 으름장을 놓았지만,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청운동 사모님’(정 회장 부인)이 단 한번, 고향 사람 인사 청탁을 했음에도 그는 승낙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성격 탓에 주변에서 ‘버릇없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회사 이익을 위해 원리원칙에 맞게 행동하려고 했고, 그렇게 살았을 뿐이라고 회고한다. 생각은 ‘햄릿’처럼 깊이 오래하고, 결정되면 ‘돈키호테’처럼 밀고 나갔다는 것이다.
◇현대와의 결별… 그리고 뛰어든 정치판
현대와 결별하게 된 것은 노태우 정권 말기였던 1991년 고 정주영 회장이 1600억원에 달하는 추징금을 내게 되자 분한 마음에 아예 당을 만들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을 극구 만류한 이후의 일이다.
이 당선자는 당시 국내 상황에서 기업 총수가 대권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회사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어서 말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1992년 1월3일 27년 동안 몸담았던 직장을 나오게 된다. 전문경영인이 오너의 의사를 거스른 만큼, 회사에 남아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 당선자는 정 회장과 달리 여당으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CEO 출신 이명박에게 정치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95년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지만 낙마했고, 다음해 총선에서는 ‘정치 1번지’ 종로구에 출마해 이종찬씨를 누르고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 1998년에 또다시 서울시장 경선에 도전했지만 선거법 재판이 끝나지 않아 의원직을 사퇴하고 도미해 버린다.
2002년 삼수끝에 서울시장에 당선한 이후 공약으로 내세운 ‘청계천 복원’을 위해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 1년 후인 2003년 7월 청계고가도로를 완전히 철거했다. 이후 2년 3개월간의 복원공사를 벌여 2005년 10월 5.84㎞의 청계천 물길을 살려냈다.
/김응일 기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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