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외치던 애국선열들 넋을 찾아가다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7-01-18 19:4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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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성지·역사 교육장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울시 서대문구(구청장 현동훈) 의주로 247(현저동 101번지)에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워 주는 역사의 산 교육장인 서대문형무소역사관(西大門刑務所歷史館)이 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애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선열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되새겨 보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방학을 맞은 어린이들에게 역사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관람에 앞서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4개 언어로 소개된 전시도록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대한 소개와 행사안내가 기록된 팜플렛을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어린이들을 위한 관내 이용 시설은 포토존 이용하기, 게시판 이용하기, 백일장 참여하기, 교육 프로그램 이용하기, 행사 참여하기 등이다.

포토존의 벽관사진찍기는 전시과 2층 옥중생활실에 마련돼 독립지사들의 고통을 체험하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간직할 수 있도록 했고 코스튬플레이어와 사진찍기는 중앙사 입구에 마련, 일본 헌병, 학생복을 입은 코스튬플레이어와 같이 사진을 찍어 역사관 방문 기념으로 간직한다.

관람후 기록을 위한 현장학습보고서는 문제 풀이와 역사논술, 백일장 등으로 구성, 초등학생용과 중·고등학생용으로 나뉜다. 또한 매년 여름방학에는 부모님과 함께 서대문형무소를 체험하고 순국선열의 뜻을 되새기는 청소년역사문화학교에 참여, 부모님과 감방체험 및 순국선열께 추모글 쓰기 등을 할 수 있다.

봄, 가을 두 번 개최하는 청소년 역사교실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둘러보며 순국선열의 뜻을 새기고 봉사활동을 통해 애국심을 기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삼일절 기념행사’에는 태극기 들고 거리를 행진해 삼일 운동을 재연하는가 하면 태극기 찍기, 페이스 페인팅, 추모글 쓰기 등의 프로그램으로 어린이들에게 유익하다.

서대문 형무소는 대한제국 말에 일제의 강압으로 지어진 감옥으로 지난 80여년 동안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표적인 탄압기관이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하고 사법권을 이양함에 따라 대한제국시대에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건립한 독립문 근처에 1907년부터 대규모의 감옥을 지었다. 이 감옥은 일본인의 설계로 당시 화폐 약 5만원을 들여 지은 것으로 480평 규모의 감방과 80평 정도의 부속 시설로 수용인원은 500여명 정도였다. 그때 전국 8개 감옥의 총 수용인원이 300여명인 것과 비교하면 대규모의 감옥이었다.

1908년 10월21일에 경성감옥(京城監獄)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일제에게 국권이 빼앗기자 이에 항거하는 민족 독립운동이 전국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일제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체포한 뒤 투옥했다. 수용인원이 증가하자 그들은 마포 공덕동에 또 다른 감옥을 지었고, 1912년 9월3일에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바꿨다.

1923년 5월5일에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다시 바뀌어 1945년 8월15일에 광복을 맞기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돼 고문을 받으며 처형되거나 옥사(獄死)했던 악명 높은 곳이다.

1945년 11월21일 서울형무소, 1961년 12월23일 서울교도소, 1967년 7월7일에 서울구치소로 바뀐 뒤 1987년 11월15일에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가기까지 이름의 변화만큼이나 많은 민족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채 1992년 8월15일에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했다.

1987년에 경기도 의왕시로 옮길 때 옥사(獄舍)는 모두 15개 동이었으나 현재는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해 옥사 7개동과 사형장 보안과 청사를 원형대로 보존했다. 그중에서 옥사 3개동(제10, 11, 12옥사)과 사형장은 1988년 2월20일에 사적 제324호로 지정됐다.

구는 1995년부터 서대문독립공원 사적지에 대한 성역화사업을 시작, 1998년 11월5일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개관했다.

관람은 1시간에서 1시간30분 내외로 동선을 따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시관-보안과 청사
형무소역사관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애국지사들을 가뒀던 서대문형무소를 첨단영상 시스템을 통해 조감하기 위해 1층은 ‘추모의 장’으로 영상실, 안내실, 기획전시실, 자료실로 공간이 구성됐다.

2층은 ‘역사의 장’으로 나라사랑에 불타는 선열들의 의거를 통해 우리의 암울했던 역사와 그 극복을 위한 저항을 계승발전하고, 온갖 고문과 억압에도 굽힘이 없었던 역사의 현장을 다시금 되돌아 보기위한 민족저항실(刑務所 歷史室), 형무소역사실, 옥중생활실 등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하층은 ‘체험의 장’으로 최소한의 인권조차 말살되고 폭력과 고문으로 인해 죽어간 애국지사들의 용기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도록 마련된 임시구금실, 고문실 등의 공간으로 구성됐다.

1층 영상실에는 수많은 우리의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침략과 탄압에 저항하다 투옥됐던 서대문형무소의 설립 배경과 그 역사적 변천 과정을 대형 영상으로 7분간 상영한다.

기획전시실은 조국 광복을 위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우리민족의 활약상을 발굴, 전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사 관련도서를 수집·소장해 역사 전문 자료실로 구성된 자료실은 독립운동사와 관련한 자료·서적들을 관람객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2층 민족저항실에는 서대문형무소가 설립된 역사적 배경과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사를 시대적 사건별로 전시하고 있으며, 강우규(姜宇奎) 의사가 남대문역(서울역의 옛 이름)에서 폭탄을 투척한 의거 장면을 첨단 영상기법인 매직비전(Magic Vision)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에 원천무효인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제로 체결, 일제의 침략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자 했던 1907년 헤이그 특사파견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강제 해산했다.

일제의 침략에 우리의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주권을 되찾기 위해 각 분야에서 저항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무력으로 저항하자 현장에서 의병들과 애국지사들을 학살했다.

이런 일제의 온갖 만행에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은 더욱 고조되고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야만성에 대한 비난이 빗발치자, 그들은 형식적이나마 재판제도를 실시하고 감옥을 신설했다.

마침내 1910년 8월29일에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제로 침탈해 완전히 식민지화했다. 일제의 침략에 대해 우리는 다양하게 투쟁했고 초기 의병활동으로 시작한 항일투쟁은 차츰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1910년을 전후해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국권 회복운동을 펼치고 있던 신민회 회원들이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사살하려 한 사건으로 신민회 회원과 애국지사 800여명이 투옥돼 모진 고문과 탄압을 받았으며 그 중에서 애국지사 105인에게 실형이 선고돼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1일에 일어난 평화적인 3·1운동은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표명한 대표적인 민족투쟁으로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3·1운동 정신에 따라 1919년 4월13일에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해 조국이 광복할 때까지 독립운동의 대표 중심기관으로 국내외 독립운동을 통합하고 지휘했다.

그밖에도 국내외에서는 민족지사들이 모여 의열단체를 조직하고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대한광복회·대한국민노인동맹단·조선국권회복단·조선의열단·한인애국단·공명단 등은 대표적인 의열투쟁 단체들이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대중적 기반을 둔 농민·노동·여성·소년 등 여러 분야에서 항일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민족 역량 위에서 1926년에는 6·10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신간회와 근우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학생들도 식민통치와 식민교육에 저항했고 1929년 11월3일에는 광주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학술·문학·예술·종교·교육·언론 등 문화의 각 영역에서도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대항해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민족 문화운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국내에서는 교통국과 연통제라는 비밀 행정기구를 설치해 동포들에게 정부의 법령과 공문 등 국정상황을 전달해 독립운동을 지휘했고 해외에서는 미국과 유럽의 각국에서 한국의 독립을 알리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상해에 임시 육군무관학교와 비행사양성소 등을 설치해 군사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17일에 중국 중경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해 대일 무장항쟁을 펼쳤고,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해 대일전선(對日戰線)에서 중·영·미 등 연합군과 함께 연합작전을 전개하다가 마침내 1945년 8월15일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光復)을 맞이했다.

형무소 역사실(刑務所 歷史室)은 서대문형무소의 변천 과정과 전국 형무소 현황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고 1934년 서대문형무소 배치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감옥시설의 대표적 기관인 전옥서(典獄署)가 서울 종로에 있었는데 1894년 갑오경장 뒤에 경무청 감옥서(監獄署)로 이름이 바뀌었다.

1907년에 감옥 사무가 법부로 이관된 뒤 경성감옥(京城監獄)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서대문구 금계동(현저동의 옛이름)으로 새로 지어 옮겼다.

조선시대는 덕치(德治)와 인정(仁政)을 표방해 감옥은 설치하되 비어있게 하는 것이 이상적이었으므로 그 규모는 작았고, 전통적 감옥인 전옥서에서는 절도나 강도 등 사회문제와 관련된 죄인들을 수감하는 시설이었다.

1907년에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뒤,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해 일본인 차관을 임명해 이른바 차관통치(次官統治)를 실시함으로써 감옥서의 고위직은 일본인이 직접 맡았고, 하위직인 감옥관리도 일본인으로 채워졌다.

1909년 7월12일에 ‘한국의 사법 및 감옥사무를 일본국 정부에 위탁하는 건에 관한 각서’인 이른바 기유각서(己酉覺書)를 강제로 체결해 사법권과 감옥사무는 일제의 통감부가 완전히 강탈했고, 1909년 말에는 9개 본감옥(本監獄)과 9개 분감옥(分監獄)을 전국에 설치, 전국 감옥의 수용인원은 5300여명에 이르게 됐다.

1923년에는 감옥의 이름을 형무소로 변경해 사용했고, 일제의 만행에 끊임없는 항일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수용인원이 급증하자 일제는 또 다시 전국에 감옥을 확충, 1934년에는 형무소 17개와 지소 11개를 설치했으며 이곳의 수용인원이 1만8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옥중생활실은 일제의 고문과 탄압에 관한 옥중생활의 실상을 전시하고 있으며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벽관(壁棺), 독방(獨房)을 재현했고 사형장의 절개모형을 입체적으로 전시했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을 공포해 이른바 사상범(애국지사)들을 수감하기 위해 서대문형무소 안에 보호교도소를 설치했다. 그들의 악법인 치안유지법을 위반할 우려가 있다는 일제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애국지사들은 물론 남녀노소 모두 특수범죄자로 분류, 잔혹한 고문과 무도한 만행으로 처참하게 희생했다.

감옥의 위생과 급식 상태는 마치 짐승의 우리와 같았고 감옥에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은 굶주림이었다. 수감인원이 급격히 증가하자 배식량을 줄여 수감자 대부분이 영양실조에 걸렸으며 그 때문에 수많은 수감자들이 굶주려 죽었다.

지하층에는 임시구금실(臨時拘禁室)과 고문실(拷問室)로 보안과 지하 감방으로 애국지사들을 신문(訊問)하고 고문하는 곳이었다. 지금은 일제가 저지른 잔혹한 각종 고문 모습들을 문헌(文獻)과 고증을 통해 재현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3월18일에 조선태형령을 제정하고 같은해 12월30일에 ‘태형집행심득(笞刑執行心得)’이라는 태형준칙을 제정해 이른바 합법적으로 극형을 가함으로써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조선인은 일본법규에 복종하든지 죽든지 그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면서 인간으로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온갖 형태의 잔혹 고문과 구타를 자행했다.

일본의 고등계 형사들도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체포, 신문과정에서부터 고문을 했으며 투옥된 애국지사들을 특별범죄자로 분류해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지하 감방에 수용하는 등 비인간적인 탄압을 했다.

▲옥사
1987년에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갈 때 옥사는 15개동이었으나 역사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해 제9·10·11·12·13옥사·중앙사·나병사(癩病舍)를 보존했고 그중 옥사 3개동(제10·11·12옥사)과 사형장은 1988년 2월20일에 사적 제324호로 지정됐다.

1907년에 일본에서 전옥(지금의 교도소장)을 지낸 일본인의 설계로 탁지부 건축소에서 감옥을 신축했다. 제10·11·12옥사 건물을 지은 연도는 알 수 없으나 1923년 이전에 지었고, 제13옥사·중앙사·보안과 청사·사형장은 1923년, 제9옥사는 1929년에 지었다. 제13사(공작사)는 애국지사와 수감자들을 강제 동원해 일을 시켰던 곳으로 형무소·군부대·관공서에서 사용하는 관용물품을 만들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제는 군수용품 생산작업을 모든 형무작업에 최우선적인 일로 삼아 강제로 동원했다.

중앙사는 제10, 11, 12옥사와 연결돼 각각의 연결통로에는 철문이 설치돼 있다. 중앙사에는 연결된 3개 옥사의 복도와 사방들을 한눈에 감시할 수 있도록 했다. 공작사로 불리는 제13옥사는 1923년 수형자들을 동원하기 위한 작업공간으로 지어진 건물로 서대문형무소의 전체적인 옥사건물군의 외곽 제10옥사의 뒤편에 위치한다.

▲순국선열추모비
순국선열추모비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 침략에 항거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돼 순국한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비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사형집행으로 순국한 선열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일제의 만행에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으나, 광복 후 일제가 물러가면서 그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증거가 될 만한 수형 기록 자료들을 모두 태워버렸다. 현재는 발굴된 자료에 의해 고증된 순국선열만을 기록했으나 앞으로 발굴 작업을 계속해 추가로 기재할 예정이다.

▲사형장
사형장은 일제가 1923년에 지은 목조건물로 서대문형무소를 비롯, 전국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된 애국지사들의 사형이 집행된 장소로 사적 제324호로 지정됐다. 사형장의 둘레는 높이 5m의 붉은 돌담이 쌓여있고 면적은 50㎡이며, 내부에는 개폐식 마루판 위에 사형수가 앉는 의자가 있으며 그때에 사용한 굵은 동아줄이 내려져있다. 앞면에는 사형 집행시 배석자들이 사용한 긴 의자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사형장의 바로 옆에는 사형을 집행한 뒤 시신을 형무소 밖의 공동묘지까지 몰래 버리기 위해 일제가 뚫어놓은 비밀통로가 있다. 일제가 그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폐쇄했으나 1992년 독립공원을 조성할 때 입구에서 40m를 복원했다.

▲지하감옥(옛 여성옥사)
일제는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을 투옥·수감하기 위해 1916년에 지하 여성옥사(獄舍)를 신축했다. 이곳은 1934년경에 옥사를 고쳐 지으면서 지하 감옥을 매립했으나 학계와 독립운동 단체들의 건의로 1992년에 독립공원을 조성할 때 발굴·복원했다. 복원된 지하 감옥의 면적은 190㎡이며, 사방 1m도 안 되는 독 감방 4개가 있다. 특히 이곳은 유관순열사가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곳으로 일명 유관순굴이라고 한다.

▲특별기획 전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매월 민족정신의 함양과 계승을 위해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애국선열 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2007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임치정(1880~1932) 선생’으로 역사관 중앙사에서 전시하고 있다.

/정상미 기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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