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적평야 지킨‘호암산 젖줄’

시민일보 / / 기사승인 : 2002-03-27 19: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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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구 ‘한우물’ 금천구 관내 해발 300여m 높이의 호암산(虎巖山)에는 ‘우물’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는 다소 규모가 큰 ‘한우물(사적 343호)’이라는 못이 있다. 서울대학교 발굴팀이 지난 80년대 후반쯤 발굴한 ‘한우물’은 규모 탓에 천정(天井) 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한우물은 처음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학계에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6∼7세기쯤 30대 문무왕이 호암산성을 세우고 가로 17.8m, 세로 13.6m, 깊이 2.5m 규모의 우물을 파 식용수와 군용수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가로 22m, 세로 12m, 깊이 1.2m로 4면이 화강암으로 된 우물을 통일신라시대에 축조한 우물 위에 다시 축조해 마치 층을 두어 쌓아올린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축조된 한우물은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도읍지를 송악(현재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궁궐을 새로 지으려 했다.

그러나 궁궐 공사가 더디게 진행되고, 밤마다 호랑이 괴물이 나오는 악몽에 시달려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한양 천도를 조언했던 무악대사는 한양 남쪽에 있는 관악산이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으며 풍수지리상 화기(火氣)의 산이기 때문이라고 조언했다.

이성계는 먼저 호암산에 호랑이를 제압한다는 이름의 호압사(虎壓寺)를 세워 호랑이 기운을 제거하고 경복궁과 일직선상에 있는 호암산에 한우물을 축조하고 우물안에 용모양의 동상을 넣어 관악산의 화기를 막았다고 한다. 광화문에 있는 해태도 이런 이유로 축조 됐다고 한다.

설화와 함께 한우물은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은 우물이다. 나당전쟁이 한강과 임진강을 경계로 벌어지고 있을 때 호암산성 내에 있는 한우물을 군용수로 사용해 충적평야를 지켰고, 임진왜란 때에는 우리나라 장군 선거이(宣居怡)가 진을 치고 행주산성의 권율장군과 함께 왜군과 대응해 전투를 벌였다.

한우물은 관악산을 오른 등반객 들이 우물가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하산하는 휴식처로 찾는 이들이 많다.
/김성훈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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